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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삶의 지도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길


선생님, “홍길동” 환자분 주상병 N00으로 갈께요

4년 전 중국에서 코로나19 (COVID-19) 발생으로 긴장감이 올라가고 있을 때 나는 대학병원 의료정보팀에서 의무기록사로 입원환자들의 의무기록을 검토하며 보험심사과와 주상병 선정과 미비기록에 대해 레지던트 선생님들께 전화를 정신없이 돌리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과는 다른 의미의 코딩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게 되면 의사선생님은 환자의 주호소(Chief Complaint:주 호소증상)를 청취하고 종합적인 판단을 통한 진단을 내리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가 어떤 질병을 앓고 있는지 의무기록에 남게 된다. 그리고 그 진단명은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인 KCD1를 통해 코드화되어 관리되는데 우리가 흔히 "감기"라고 부르는 질병은 "급성 코인두염", "급성 기관지염" 등 이라는 질병명으로 J–로 시작하는 코드를 부여하고 학교에서 사다리를 타다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면 S–, W– 코드를 부여한다. 2 표준에 따라 분류된 질병분류 코드를 기반으로 청구가 이루어지고 우리들의 진단료 또한 책정되는 기준이 되며, 건강보험통계의 통계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를 내가 있던 세계에선 "코딩"이라 불렀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의무기록상의 코드들과 환자의 입원부터 퇴원까지 발생하는 모든 사건, 치료과정에 대한 검토를 주로 맡아 수행했다. 이 외에도 (의무기록사)가 하는 일에는 정질량 분석, 암 등록, 진료기록 통계 등 더 다양하게 많지만 이를 IT, 프로그래밍 세계로 끌어들여 와 비유해보자면 아마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객의 서비스 입장 시점부터 퇴장 시점까지 발생하는 모든 이벤트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표준에 따른 분류와 데이터 유효성, 정량성, 신뢰성을 검토 및 유지하고 통계 분석하는 작업

이전 세계의 고민과 회고

그때를 회상하자면 상병들 간의 관계, 유효성 검사, 정량적인 검토를 통해 어떻게 하면 나에게 주어진 "기록들의 정질량 분석과 완전하고 질적으로 충분한 기록으로 만들어낼까?", "여러 사람이 각자 검토하는 것을 한 사람이 검토하는 것처럼 일관성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휴먼에러를 1차적으로 방어해주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부분은 자동화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등과 같은 엔지니어스러운 고민을 많이 했다. 물론 이런 고민은 그 당시로선 나의 권한과 책임을 넘어서는 고민3이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계속 남아있었다.

기록은 환자가 퇴원하거나 병원을 나가는 순간 더는 수정 및 변경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정해진 시간"과 "완전성"이라는 제약조건 속에서 항상 고군분투했다. 병원이라는 특수한 배경으로 의무기록이라는 것은 개인정보 및 법적인 영역 속에서 매우 민감한 데이터 덩어리로 항상 조심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어느 정도의 강박과 예민함은 어느 정도 항상 있었던 것 같다. 추후 이런 성향은 꼼꼼함과 세심함이라는 부분으로 발전될 수 있었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관련 분야가 아니라면 생소한 직업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면허취득을 통한 자부심, 의무기록이라는 민감하고 중요한 데이터의 완결성에 기여한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이 일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든 끌림이었다. 돌아보면 나는 연봉만큼이나 내가 하는 일의 역할, 그 일에 대한 의미를 정의하고 부여된 가치에서 오는 끌림(?)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도 그때와 근본적인 마인드는 비슷한 것 같다.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이 일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가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으면 선뜩 손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치를 남들도 동의해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새로운 분기점

그러던 중 원내 세미나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세미나의 주제는 재단 산하 병원들 간의 CDW(Clinic Data Warehouse)구축 및 사용법과 (인공지능을 활용한)연구 지원을 위한 데이터셋 안내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 시점은 대학병원들이 그동안 쌓아두었던 수많은 의료 데이터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의 다음 스텝이면서 실행단계의 시작점이었고 미래시장의 확장 가능성이었다. 이는 16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알파고와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과 활용 가능성을 본 영향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기록을 검토하면서 느꼈던 고민에 대한 욕구가 꿈틀거렸다. 나에게는 더 큰 가치 위한 확장/생산하는 일로 보였다. 집에 와서 관련 키워드들을 검색해보고 발전 가능성과 확장성이 많은 분야라고 생각되었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지금의 역할은 그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역할 군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그동안 스스로 부여한 가치와 의미를 내려두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크게 다가왔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결정했다.

첫 발걸음과 멘토

커리어를 피벗하고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는 헬스케어 분야의 스타트업이었다. 헬스 데이터를 활용하여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질병을 해결하고자 하는 미션을 가진 업력이 3년이 안되는 매우 초창기 회사였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소프트웨어 팀이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시기였다. 쉽지 않았다. 스타트업 특성상 한정된 자원과 인원이라는 제약사항이 많아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 넓었다. 과제기획서를 작성할 때도 있었고, 자체 서버 관리, 웹서버와 DB를 구축, 데이터 수집 위한 물리 센서와 소켓통신을 구현하고, 데이터 뷰어 프로그램, 사업계획서를 써보기도 하고, 시험평가인증 진행, 개발팀 문서관리, 박람회 참석, 워크샵 기획 등등 여러가지 일을 해봤던 것 같다. 물론 1년차 신입이 이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해낼 순 없다는 것을 안다. 그 당시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했지만 부족함을 많이 느낀 계기도 되었다.

그보다 나에게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여기서 만난 팀장님이자 CTO인 이사님이었다. 모바일 게임업계의 태동기부터 게임업계에 몸담고 계셨던 CTO 분이셨다. 참으로 뼈속까지 엔지니어이셨던 분이셨다. (당신께서는) 옛날 사람이라 요즘 언어들이 눈에 안 익으시다며 허허 웃으시며 바이트코드를 보며 리버스 엔지니어링하셨던 썰을 푸시던 것이 기억난다. 뿐만 아니라 비지니스 문제를 다각도로 바라보는 안목도 꽤 뛰어나셨다. 본인이 생각하시는 시니어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나에게 설명하는 모습은 내가 그를 롤 모델로 삼는데 있어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이것을 큰 행운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시선(우리는 이것을 카메라 뷰라고 표현하곤 했다)와 틀들을 본인의 것을 보여주며 "한번 맛볼래? 그리고 너껄로 튜닝해봐" 라고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이어었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 언어나, 프레임워크, 툴에 대한 이야기보다 생각하는 방식, 태도, 문제를 바라보는 법과 같은 조금 더 추상화된 가치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해주셨다. (기회가 된다면 이사님과 나누었던 대화형식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 지금의 나의 모습과 생각에 꽤 많은 영향을 준 사건을 꼽으라면 이사님과의 만남을 고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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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여러 이유로 잠시 일을 그만두고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서 고민 중이다. 첫 회사를 경험하면서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모델링하고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에 대한 궁금증과 열망이 커졌다. 그리고 비즈니스 모델에서 데이터 활용에 대한 설계도 같이 고려되는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것에 관한 관심이 많이 커졌다. fancy 한 기술과 빅데이터가 엉성한 비즈니스 모델을 자동으로 완성해주진 않는다.4

이 분야로 넘어온 지 오래되지 않아 경험이 그리 많진 않지만, 영리사업을 하는 기업분야로 넘어온 이상 결국에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세상에 없던 가치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수립하고 그 모델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tech를 고려하고 새롭게 만드는 사람들이 개발자, 프로그래머, 데이터 엔지니어, 백엔드, 프론트엔드 개발자등으로 불리는 것 같다.

첫 회사에서 만난 CTO님과 나눈 대화 중에 이런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가 만드는 가상세계에서는 우리는 우체국 집배원이 되기도 하고 쿠팡맨이 되기도 하고, 공사 인부가 되기도 하고, 상인이 되기도 해". 나에겐 이 말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쓰여질 이야기에서는 내가 매력을 느끼고 욕구를 느끼는 곳에서 필요한 모습으로 계속 변하며 표현되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전에는 이런 변화가 매우 불안정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느꼈지만, 세상에 완벽하게 동일한 (비지니스)모델은 없으므로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병원에서 입었던 가운을 가상세계에서 다시 입어볼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날을 기대하며 삶의 지도를 마무리하려 한다.




  1. 세계보건기구에서 표준화한 ICD(국제질병사인분류)가 골격, 한국 실정이 고려된 한국형 질병사인분류체계 

  2. 실제로 해당 코드가 존재할만큼 세분화 되어있다. (W11.2, 사다리에서의 낙상, 학교, 기타 시설 및 공공행정 구역) 

  3. 조직내의 구성원들과 합의와 공감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뿐더러 개인이 조직에 없던 관심을 만드는 것은 더욱 큰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4. 백마 탄 왕자님은 세상에 없다. 사실 있길 바라는 절실한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나도 종종 이런 착각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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